요즘 '복고'가 대세라고 하는데...
삐삐, 시티폰, 락카페, 서태지, 오빠부대, 워크맨, 별이 빛나는 밤에...
요즘 1990년대 문화를 소재로한 드라나마 대중가요들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대표적인 '응답하라'라는 문구는 마치 시대의 유행어가 된 듯 다양한 매체와 분야에서 너도나도 앞다투어 '복고'의 향수를 불러내기 위한 구호처럼 사용되고 있다.
앞서 얘기한 단어들의 개념을 잘 모르는 세대들은 재미없겠지만 그 시절을 황금기로 보낸 이들에겐 군대이야기처럼 피해갈 수 없는 안줏거리들이다.
90년대 초반에 대학생활을 시작한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시기라 그런지 쉽게 지나쳐지지 않긴 마찮가지다. 사실 바쁜 일상 중에 큰 관심을 갖진 않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한 케이블 TV 드라마 때문에 요즘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던 동기, 선후배들의 이름과 모습 그리고, 그때 좋아했던 음악들을 찾아보는 일이 취미가 된 듯하다.
지하철로 왕복 3시간 가까운 출퇴근길에 늘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들을 밀어낸 스마트폰은 추억찾기 도우미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이런 유행들이 비단 1990년대를 주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현상으로서 '복고'가 유행인 세태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지금 현재에 대한 불안심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이같은 현상이 발생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여론인식 조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복고'의 분위기가 사회적인 피로감에 찌든 개인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현재의 긴장감과 피로감의 원인이 대부분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안락했던 과거'를 회상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복고'분위기에 환호하는 분위기는 지금 심리적으로 모든 세대에 걸쳐 공통적인 일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현재 모든 세대가 힘들다고 애기한다. 아동청소년들은 학업과 진학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고 하고, 20대 대학생들은 등록금 마련과 취업 걱정으로 힘들고, 30대는 앞이 보이지 않는 경제적 불안감 때문에, 40대는 불안한 은퇴 때문에 힘들다. 50~60대라고 해도 자식들 걱정과 본인들의 노후 문제로 심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세대가 위안을 받고 싶어한다. 이에 편승한 각종 매체에서는 '힐링'이 화두로 넘쳐나고 있고, 복고트렌드를 활용한 다양한 마케팅으로 이들의 소비를 끌어내는 많은 시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재미있고 트렌디한 복고의 유행들 대부분이 굉장히 감각적이고 상업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시대를 뛰어넘을 만한 가치나 개념을 갖기엔 쉽지 않은 듯하다. 과연 이러한 개인적 또는 집단적인 과거로의 회귀증세가 우리의 삶과 영혼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줄 수 있을까?
예술의 '복고'는 고전(古典)?
지금 사회적, 대중적으로 떠들썩한 '복고'에 대한 관심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예술계와는 왠지 좀 거리가 있는 듯하다. 예술에 있어서 '복고'라는 개념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이나 창장에 대한 고통 없이 지나간 시대의 예술을 모방하거나, 회귀하거나, 반복하거나, 하는 복고적인 예술행위들은 과연 어떻게 수용해야하는 걸까? 흔히들 고상하며 지적이고 학구적인 예술작품들을 접하면 고전(古典)이라는 표현 하에 알아 듣지 못할 설명을 늘어놓는 경우를 종종 접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고전에 대한 이해는 곧 유식함과 무식함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 것처럼 '고전'이라 불리는 에술세계는 왠지 높이 솟아 쉽게 오르지 못하는 절벽처럼 느껴진다. 고전문학, 고전음악, 고전미술 등 고전예술(古典藝術)이라 불리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지금까지 전해지는 예술'을 고전예술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혹자는 고전예술은 '시대를 뛰어 넘어 변함없이 향유할 만한 가치를 가진 예술'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반인들 대부분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습이나 교육의 과정을 통해서 습득된 지식이 있다면 어렵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다. 가끔은 개인적 취향에 맞는 예술작품이 '고전'이라는 이유로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거나 고루하다고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도 있다. 예술을 지적인 수준이나 유행으로 이해해야할 필요는 없음에도 말이다. 어찌됐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고전(古典)'이라고 하면 일단 멈짓 하는 심정이 드는 건 일부 개인만의일은 아닌 것 같다. 고전으로 문화예술의 복고를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좀 순진한 생각이겠지만 사전적, 보편적 의미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 인정되고, 시대를 뛰어 넘어 변함없이 향유할 만한 예술이 고전이라고 한다면 문화예술계의 새로움과 창작을 위한 '복고' 유행을 고전의 재해석으로부터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전은 세대를 초월해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새롭게 재구성 할 수 있다.
자본주의, 물질만능시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너도나도 인문학이니 고전이니 하며 인간성의 회복을 이야기 한다. 어떤 식자들은 <논어>를 말하거나 공자를 입에 올린다. 그러나 인문학도 고전도 말만 한다고 인간성과 영혼을 살릴 수 있는게 아니다. 고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부터 바뀌어야만 뭔가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쿠바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그의 저서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 고전이라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는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고 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인 것 같지만 되새겨 보면 현실속에서의 유용성보다는 가치적인 유익성이 더 높기에 고전이 필요하다는 얘기인 것 같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유익한 것이 고전일 수 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바로 끊임없는 향유와 해석의 연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고전이 되는 것이다. 그럴 여지가 없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책'으로서 고서(古書)일 분이다. 고전의 가치는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으며 고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고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고전예술 작품들을 통해서 잘 아는 것 혹은 잘 안다고 믿는 지식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이정도 수준으로는 고전이 유익하다고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옛것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움. 즉,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그리고 새로운 시대마다 거듭 새롭게 해석되면서 오래도록 고전의 명성과 유익성은 지속된다. 더불어 새로운 해석은 곧 해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지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디딤돌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오래된 것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움.
공자는 옛것을 익혀야 새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잘 알려진 사자성어이다. 한자의 뜻대로 풀이하면 온은 따뜻할 온, 익힐 온, 데울 온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온고는 과거를 익히라는 말이다. 과거의 것을 지키라는 뜻으로 오인 되서는 안된다고 한다. 과거를 익힌다는 것은 과거의 것들, 오래된 것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하기 위해 과거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과거의 것들에 집착하고 매몰되어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과 영혼은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사의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아버지에게서 아들의 모습이, 손주에게서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듯이 우리의 삶이든 위대한 예술이든 서로 얽혀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나간 것들을 그냥 지나간 것들로 남겨두지 말고 지금 현재 우리의 눈앞에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지혜를 얻는 것, 새로움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온고지신을 대하는 시각으로서 좀 더 유익하지 않을까?
문화예술이든 경제분야이든 어떤 분야이든 간에 한편으로 우리는 신선함, 새로움을 찾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살고 있다. 집착이라는 단어가 다소 부정적으로 들릴진 모르겠으나 그만큼 과거와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가치추구에 더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
특히, 옛것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가혹하리만치 냉정할 때도 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무조건 버리고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좀 더 높은 현재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턴 지나간 것, 옛것들로부터 현재와 미래의 패턴을 발견하고 예측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다. 위대한 인물이나 예술가들 대부분은 자신이 속해있는 분야의 과거를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새로운 변화나 창조를 시도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온고(溫故)를 문화예술을 대하는 시작과 기본으로 하여 배우고자하는 분야에 대해 쭉 이어져 오던 흐름과 패턴을 익히는 과정이 문화예술교육의 한 부분된다면 유용할 것 같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면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오래된 것들을 대하는 분위기 좀 더 새로워 질 수 있지 않을까?
연초만 되면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분주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복고’나 ‘고전’에 대해 한 번쯤 다르게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오래된 것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움에 대해서 말이다.
장재환
(서울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총괄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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