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뜨르릉]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 연극 - ① 연극에는 ‘사이’가 존재한다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6-03-17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 연극 - ①

연극에는 ‘사이’가 존재한다

글 : 권지애 / 극작가

침묵이 말하는 것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는 문학 장르다. 희곡은 주로 대사와 지문으로 구성된다. 그중 지문은 ‘해설과 대사를 뺀 나머지 부분의 인물의 동작, 표정, 심리, 말투 따위를 지시하거나 서술’한다. 흥미로운 것은 ‘사이’다. 대사와 대사 사이에 잠시 멈추거나 정적을 두는 지시의 의미인데, 실제 희곡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김남건 뭘 자꾸 보라는 거야.

조형래 응, 그때 그 원고 온 거랑 내가 대충 편집 좀 해봤거든.

무대엔, 용우와 샘이 둘만 남는다.

사이.

장샘이

박용우 저 친구, 곧잘 외골수처럼 구는 게 있죠.

윤성호,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이음, 2019, 29쪽

'사이'는 단순한 지시어를 넘어, 침묵 속에서도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과 서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이 연극적 '사이'에서 우리 삶의 본질적인 연결고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기 위한 잠시 멈춤(pause). 말을 잠시 멈추고 서로의 호흡과 표정을 느끼는 시간을 뜻한다. 연극에서 ‘사이’가 침묵 속에서도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이듯, 우리의 삶에서도 대화 속 멈춤, 관계 속의 적절한 거리는 서로의 존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지난해 전남 고흥군 문화예술단체의 부탁으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연극과 미술을 엮어낸 융합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해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문화예술단체로부터 받은 기초자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당 마을은 고흥군의 끝자락에 있는 곳으로 상촌, 중촌, 하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고흥읍에서 마을회관(중촌에 위치)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되며, 마을의 실거주 인원은 140여 명인데, 65세 이상 고령화 비율이 79%인 곳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마을의 노인분들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1부는 대형 시트액자 너머에 있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따라 그려보고, 2부는 음악의 리듬에 따라 빠르게 혹은 천천히 움직임을 만들어보는 시간으로 구성했다.

몸 건강과 마음 건강을 모두 지키겠다는 목표가 무색하게 이 수업은 3회차 만에 슬픈 결말을 예상하게 했다. 16명의 참여자가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유를 여쭤보니, 날이 맑으면 밭에 풀을 뽑아야 하고, 비가 내리면 할아버지(남편)가 바다로 가지 않으니 끼니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마을회관에서 함께 김장하는 날도 있었고, 심지어는 사람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싫다는 의견도 있었다. 문화예술단체와의 8회차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결국 참여자분들이 계시는 마을회관으로 직접 찾아가 참여를 간곡히 부탁하고 독려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몸도 움직이고 생활의 활력도 찾아드리겠다는 이 프로그램은 왜 실패했을까.



연극에서 ‘사이’가 침묵 속에서도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이듯, 우리의 삶에서도 대화 속 멈춤, 관계 속의 적절한 거리는 서로의 존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권지애

그 ‘사이’를 놓쳤을 때

프로그램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고민하며 ‘사이’의 의미를 곱십게 되었고, 문득 음악극 이 떠올랐다. 이 작품은 ‘목소리 프로젝트’의 작품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한센인의 슬픔과 고뇌,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헌신, 장애인의 사회적 차별과 배제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절절하게 풀어낸다.


섬:1933~2019 공연사진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실존 인물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센인들의 섬 ‘소록도’ 속 편견과 차별의 서사를 지금의 ‘나’이자 동시대 문제로 확장시킨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극은 물리적・심리적 ‘섬’을 오가며 인물들 간의 깊은 ‘사이’를 탐색하고, 서로의 다름과 고통을 ‘멈춰 서서 들여다볼 것’을 말한다. 한센인들과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 ‘사이’의 묵직한 침묵과 교감이 관객들에게 혐오를 넘어선 진정한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문화예술단체에서 진행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에서는 그 ‘사이’를 간과해 버렸다. 참여자들에게는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빡빡한 움직임보다는,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삶을 존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멋진 프로그램을 준비했어요. 와서 즐기세요. 여러분의 삶이 즐겁게 변할 겁니다!’라는 일방적인 시선과 편견, 오만이 만든 실패였다. 참여자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활력’을 얻는 것보다, 그들이 평생을 살아온 방식과 삶의 맥락을 인정받고 이해받는 ‘공감’이 더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바쁜 일상, 삶의 리듬 속에 필요한 ‘멈춤’과 ‘숨’을 발견하는 대신, 일방적인 ‘활동’만을 제공하려 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잇는 다정한 빈칸

문화예술교육에서 ‘참여자 중심’은 여전히 화두다. 일방적으로 참여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넘어, 참여자 스스로 경험을 통해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는 잠시 멈춰야 한다. 멈춰서 상대방의 눈을 보고 표정을 살피고 호흡을 맞춰보자. 문화예술교육은 그저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른 ‘사이’를 발견하고, 그 다름을 존중하며 함께 ‘멈춰 서서’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공감의 장이어야 한다.


참여자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활력’을 얻는 것보다, 그들이 평생을 살아온 방식과 삶의 맥락을 인정받고 이해받는 ‘공감’이 더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권지애

타인의 관심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은 사라져 가는 ‘사이’들을 다시금 발견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서로의 빈칸을 채워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연극의 ‘사이’가 침묵 속에서도 깊은 의미를 만들어내듯, 우리 사회의 ‘사이’ 또한 일방적인 소음이 아닌, 서로를 향한 따뜻한 이해와 공감으로 채워질 때 진정한 연결이 시작될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바로 그 아름다운 ‘사이’를 위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권지애 | 극작가

사건의 과정 그 미묘한 층위 안에서 흐릿해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오늘》, 《우리의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The Inside》 등을 쓰고, 무대에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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