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봄날은 지금이다!
통신원 박영수
“음마.. 고추 딸 게 다 떨어져 브렀는디 어째야 쓰까요...?”
재미있는 해프닝이다. 밭에서 고추를 따며 이야기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NG가 계속 나서, 동선 내에서 딸 수 있는 고추를 다 따버렸다. 결국 회의 끝에 고추 따는 시늉만 하기로 한다.
“아이고, 내가 잘했어야 했는디...” 눈치 보시는 어머님 모습이 소녀마냥 귀여우시다.
들판을 마주하고 선 카메라 두 대,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붐마이크, 한껏 멋들어진 패션의 어르신 배우 분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자 갑니다잉. 씬13, 1 다시 2, 착!”
맛깔나게 슬레이트 치는 소리에 이제야 실감이 난다. 우와, 여기 진짜 영화 찍는 곳이구나.
금호중학교 후문 건너 위치해 있는 작고 평범한 농장지대가, 오늘만큼은 화려한 영화세트장으로 거듭났다. 열세 번째 씬인 농장씬을 찍는 오늘은 땡볕더위가 극에 달하는 날이다. 그에 걸맞게 밀짚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완전무장하고 나오신 어르신들. 내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더위마저도 불사를듯하다. 농장의 초목들 뿐 아니라 두암동 어르신들의 열정도, 더울수록 푸르게 익어가나 보다.
두암동 어르신들과 함께 이번 마을영화 ‘두암골 엘레강스’를 제작하고 있는 단체는 <사단법인 광주영상미디어클럽>이다. 총기획자이신 강홍길 선생님과 촬영감독 및 시나리오 연출을 담당하시는 박순연 감독님께서 촬영장을 진두지휘하고 계신다. 배우들은 제목에 나와 있듯이 두암동에 거주하시는 어르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촬영이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배우들의 열연은 물론이거니와 능숙하게 슬레이트 치는 어르신, 땀으로 샤워해가면서도 절대 붐마이크를 놓지 않는 어르신, 디테일하게 배우들의 동선과 위치를 조정하시는 감독님까지 모두가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쳐있다. 무더위와 맞먹는 촬영장의 열띤 분위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점점 더 궁금해진다. 어떤 영화들을 찍어왔으며, 이번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감독님께 조심스럽게 이것저것 여쭤보았다.
Q. 감독님부터 배우님들까지 이번 영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보여요! 어떤 영화인지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A. ‘두암골 엘레강스’는 노인들의 욕심 많은 인생 2막에 주역 점을 둔 시나리오예요. 정년퇴직 후 노인들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을 통해 삶을 역전시켜가는 과정을 담고 있죠. 영화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기타, 난타, 탁구, 아코디언, 서양춤 등 다양한 것을 배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배우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운 내용을 토대로 사회 기여와 봉사에도 이바지하고, 다른 많은 좋은 일들을 하지요.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서로 맞아가며 교감이 일어납니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삶에 활력이 생기죠.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마지막 씬에서는 진도 앞바다에서 함께 일몰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으려고 합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더욱 멋지게 살아보자, 오늘 해가 져도 내일 다시 해가 돋아나듯 우리에게도 내일은 다시 온다! 라는 외침과 함께요.
Q. 촬영에 임하시는 모습들이 프로 못지않으시던데, 광주영상미디어클럽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궁금해요!
A. 저희는 2012년에 창단된 단체입니다. 뜻이 맞는 노인들을 모아 여러 영화들을 만들어왔지요. 광주 국제영화제, 각종 노인영화제 입상, 공중파 방송 출연 등으로 많은 작품들을 알려왔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무등산아리랑, 석양의 멜로, 허름한 의자 등이 있고요, 활동했던 영화제로는 정읍노인영화제, 서울국제노인영화제, 광주국제영화제 등이 있어요. 하다보면 정말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기 때문에, 스텝들 뿐 아니라 배우들 중에서도 지속적으로 함께 일하고 있는 분들이 있지요.
아, 어쩐지 프로의 냄새가 찐하게 나더니, 오랫동안 함께 일 해온 프로들이 맞았다. 프로답게 연습량도 만만치 않다. 4월부터 맹연습을 시작하여 대본 리딩 연습만 열 번 이상 했다고. 박순연 감독님 의 경우에는 모임 결성 이전부터 영화 관련 일을 해오셨다고 하니, 그 전문성이 남다를 수밖에.
그렇다면 배우들은 어떨까? 이번 영화에서 두 명의 주인공 중 한명이자, 광주영상미디어클럽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최인순 어머님께 인터뷰를 요청해보았다. 영화계의 꽃 여배우 되시겠다.
Q. 안녕하세요!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으셨다고 들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인가요?
A. 임수정이라는 역할로, 고상하고 지적이며 특히 시 쓰기와 시 낭송에 관심이 있는 캐릭터예요. 사실 제 자신과 굉장히 비슷한 역할이에요. 실제로 제가 광주문인협회에서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거든요. 시인협회 이사로도 있고요. 영화 중간에, 취향이 비슷한 남자 주인공과 썸씽(로맨스) 관계에 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해요. 아무튼 인생 2막에도 본인의 관심사를 놓지 않고 삶에서 지속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어요.
Q. 정말 어머님과 비슷한 역할이네요. 이전에 다른 영화도 여러 번 촬영하시면서 내공이 생기셨다고 들었어요.
A. 배우로 촬영한다는 것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활력이 돼요. 제 나이 대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쉽게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니까요. 저는 이번 영화가 네 번째 촬영이에요. 무등산아리랑, 늘 푸른 인생, 석양의 멜로 등의 작품을 광주영상미디어클럽과 함께해왔었죠. 누구나 그렇듯 처음에는 서툴고 어색했는데, 하다 보니 조금씩 노련해지고 자연스러워지고 그렇더라고요.
Q. 와, 정말 멋지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사를 볼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A. 여기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연세가 평균 70중반이 넘어요. 아직은 그보다 어린 나이지만, 곧 저의 미래가 되겠죠. 지금도 시간이 훅훅 지나가니까요. 분명한 것은, 70대 중반이 넘는 나이에도 저분들처럼 멋지게 살고 싶다는 거예요. 보통 그 나이가 되면 자신감도 떨어지고 힘이 부칠 듯도 한데, 항상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지셔요.
저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인생 2막에도 얼마든지 멋지고 세련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영화 찍는 일을 계속 할 거구요.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이 일은 저에게 좋은 추억들을 남겨줄 거예요.
인터뷰가 끝나고 와보니 고추밭 씬의 동선 문제로 이런저런 회의가 이어지고 있다. 몇 분전에 트럭소리가 나서 촬영을 방해하더니, 다시 가다듬고 씬을 이어가는 찰나에 뜬금없이 비행기가 상공을 가르며 약을 올린다. “아따. 먼 놈의 비행기가 보고 싶을 때는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이럴 때만 나타나서 방해한다냐!” 감독님의 투덜거림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컷! 하늘에서 갑자기 붐마이크가 내려오잖어, 좀 제대로 들고 있어봐야”
“아니 들어보면 알 것인디! 요것이 보통 무거운 게 아니랑께!!”
아, 정말 영화 찍는 게 쉬운 일이 아닌가보다.
하지만 그 어떤 분도 불평하시는 법이 없다. 이런저런 NG와 소음 가운데에서도 또 다시 진지하게 카메라를 부여잡는 감독님을 보며, 똑같은 씬을 몇 번이고 반복해도 다양한 에피소드들에 웃음기를 잃지 않는 어르신들을 보며, 문득 잔잔한 감동이 일렁거린다. 이게 진짜배기 인생이 아닌가. 영화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매개체이건,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 웃고 떠들고 즐기는 그런.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몸소 느끼며.
어느새 정들어버린 촬영장을 뒤로 하고 농장의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열정 넘치는 감독님의 목소리는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
“자자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자고잉! 씬13, 2 다시 3, 착!”
“음마, 내가 실수로 플레이버튼을 안눌러부렀네, 다시해주소!”
“아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실수를 줄여보드라고. 자자 시작하네! 착!”
#씬 13, 2-3
정호영 : 좋아요. 남은 생애 중에서 가장 젊은 날인 오늘, 오늘 시작합시다.
손진희 : 맞어. 시작이 반이여. 생각만 갖고는 암 것도 할 수 없응께.
(중략)
송동근 : 꽃은 자신을 자랑하지도, 남을 미워하지도 않는다지요? 저 혼자 피었다 저 혼자 지는데 왜 곱다 추하다 말들 하는지...
임수정 : 꽃이 지는 것은 다시 피겠다는 약속인데 그 모습이 추하다 하는 것은 사람의 잣대 아닐까요.
-'두암골 엘레강스‘ 대화 中-
어르신들의 눈부신 도전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