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호] 보라색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_ 정두리 모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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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7-09-06 조회수 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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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문화예술교육 운영단체 토요/지특/창의 워크숍]

 

보라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두리_8기 모담지기

  

차를 타고 광주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창 밖에 금새 너른 논밭이 펼쳐진다.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전라남도 담양 두리농원으로 향했다. 매미 울음소리로 가득 채워진 논밭 사이 좁은 길을 한참 가다보니 저 멀리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2017 광주문화예술교육 운영단체 워크숍' 참여를 위해 광주 지역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오랫동안 진행해 온 운영단체부터 올 해 처음으로 시작한 운영단체까지 총 52개 단체가 한데 모였다.

 

첫번째 시간으로, 추계예술대학 정원철교수와 잔꾀가 함께 <‘대안’에서 ‘대항’으로>라는 주제로 문화예술교육의 치열함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었다.

  

#예술이라는 것과 문화예술이라는 것을 왜 나누는 걸까? 

같은 선상으로 볼 때 교육과 혁신 교육을 둘로 나누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나눌 필요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크게 봤을 때 내 삶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교유한 관점을 만들어가는 데 참고가 될 수 있게 해주는 예술교육은 바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고유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보라색을 만들어서 육각형 도면 중에서 한쪽 면을 색칠해보았다.

 

자리에 앉아서 5명이 한 테이블에서 어렸을 때 많이 보던 물감과 붓을 잡고 색을 칠하니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한 생각도 나고 즐거운 분위기, 편안한 분위기였다.  70여 명의 사람이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어서 만드는 보라색은 같은 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한 면을 색칠하는 방법 또한 제각각이었다.

 

​#보라색이라는 의미

정원철교수는 세상을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분명한 입장이 없이 예술을 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 때 느낀 것이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에는 수많은 보라색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었을 때 나오는 보라색이라는 색은 단순한 원색이 아닌 내가 만들어내는 ‘너와 나’의 혼합물이라는 깨달음을 느낀 것이다. 또한, 경계선이 정확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면들이 존재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제야 ‘나 같은 사람도 예술을 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늘 문화예술 교육에 참여한 70여 명의 보라색으로 벽면을 꾸며보았다.  

예술교육이 내 삶을 변화시키는 데 강력한 힘은 ‘고유성’의 가치를 알아가는 것이다. 이분법의 틀에 갇히지 말고 70명이면 70가지의 보라색을 가진다. 여기서 100명이면 100가지의 보라색을 만날 수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본인이 생각하는 보라색을 다양한 면이 만나는 정육면체로 이어 붙여 나의 고유성을 보장되게 하되 서로의 고유성과도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어떨지 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  

 

#인디언들의 이름

우리는 인디언들의 이름 짓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6번 이름을 바꾼다고 한다. 각자 삶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서 이름을 바꾸면서 살다 보니 그렇다고 한다. 스스로 붙인 이름으로 한 번 살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페르난두 페수아라는 포르투갈 작가가 있다. 그는 이명으로 수십권의 글을 집필했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작성하였다. 그의 글 중에 ‘최후통첩’이라는 글을 보면 ㅇㅇ을 보라, ㅇㅇ으로 보라, ㅇㅇ하게 보라, ㅇㅇ하여 보라는 문구가 나온다. 우리도 예술 가치를 자기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반영된 보라를 찾아보았다.  

 

태연하게 보라

나답게 보라

다양하게 보라

즐겁게 보라

찬찬히(유심히) 보라행동하여 보라

타인을 나인 듯 보라  

그동안 경험했던 것들에서 놓쳤거나 중요하게 깨달았거나 이건 꼭 지켜야겠다는 기타 등등 각자의 생각과 중요하게 느낀 보라를 통해서 예술 가치에서의 ‘고유성’을 찾는 첫 번째 시간이었다. 

  

두 번째 시간. 과연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명사와 동사 중에서 치매 병에 걸린 사람은 무엇을 먼저 잊게 될까? 여기서 명사라는 것은 인간적인 삶이고 동사라는 것은 동물적인 생존을 뜻한다. 동사가 남았을 때는 어떨까? 그리고 명사가 남았을 때는 어떨까? 자기의 경험이 수반된 명사. 즉, 자기화된 명사를 가지고 살았을 때는 다르다. “저거 좋아해요.”라고 동사만 강조했을 때와 “물..”이라는 명사를 (어떤 의미를 품었는지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했을 때 전달되는 의미도 다르다. 

 

마찬가지로 예술 속에서도 강력한 상징으로 될만한 작품들이 있다. <시>라는 문화예술을 영화화해서 표현한 작품, <새라고 믿고 싶은 돌>, 화가 밥 로스의 20분 라이브를 보면서 이를 보고 표현한 <yellow screem>, 틀팔가 광장 좌대 위에서 100일간 벌어진 1시간의 퍼포먼스 one&other 등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자기 자신만의 고유성을 투여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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