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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지영씨의 인생부록II
일과 사랑, 성취와 돌봄 그 사이에서
마민주 통신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소설에서 울프는 과거에는 분명히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잊혀져버린 여성들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울프는 여성에 대해 글을 쓴 남성들의 책을 읽으며 이름 모를 존재를 떠올립니다. 셰익스피어의 누이, 셰익스피어가 가진 재능을 똑같이 가진 사람. 그녀에게 주디스라는 이름을 부여합니다. 주디스는 모험심이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빛나는 가능성을 가진 아이였을 것입니다.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상념들에서도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 글로 풀어낼 능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디스는 법과 관습이 온 힘을 다해 여성을 억압하는 시대에서 살았습니다. 여성들에게 허락된 길은 푹신한 잔디밭이 아닌 거친 자갈길뿐이었습니다. 울프는 상상합니다. 만약 주디스가 자신의 오빠만큼이나 세상을 떠돌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녀에게 잠재되어있는 재능을 키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녀는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 「자기만의 방」 중에서
비단 소설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울프는 여성들의 독립을 주장하며 이를 위해선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그녀가 돈과 방을 논하던 때로부터 90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지금의 우리는 가여운 버지니아가 주머니에 돌을 넣으며 호수로 걸어 들어가던 오후보다는 어쩌면 나은 시간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버지니아보다 덜 가난하고 덜 억압받으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찾아 전전하고 있습니다.
▲사진1. 지영씨의 인생부록 포스터
방해받지 않는 깊고 조용한 새벽만이 여성의 유일한 방이 되지 않도록, 광주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는 <지영씨의 인생부록Ⅱ-자기만의 방> 프로그램을 기획하였습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차용되어 2019년부터 2년째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출산과 육아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3·40대 여성들, 즉 모든 지영씨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방이라고 할 수 있는 내 몸을 인식하는 몸 활동을 시작으로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무용, 자기만의 방을 창조하는 예술 활동과 전시 관람 등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은 비대면 온라인 플랫폼 ZOOM을 통해 진행되고, 수업 재료 및 아트키트는 택배로 배송됩니다.
▲사진2. 지영씨들과 이야기나누는 강사님
▲사진3. 몽탁풀치마를 입는 과정
지난 10월 16일 광주문화재단 4층에서는 3번째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간단한 몸 활동을 통해 자기 몸을 인식하고, 소외되었던 자기 몸을 재발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3번째 수업에서는 본격적인 무용을 통해 자기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고, 이로써 자기를 인정하여 삶이 확정되는 경험을 함께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수업이 시작되고 지영씨들은 ‘맘충’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일어나는 상황을 제시하고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답을 주고받았습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장면 중에서 아이가 커피를 쏟았을 때 뒤에서 커플이 수군거리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물었을 때 지영씨들의 대답은 ‘웃으면서 천천히 따진다.’, ‘뒷담화하지 말고 앞담화하라고 용기 있게 말한다.’, ‘나도 혼잣말하는 것처럼 커플들에게 독백을 크게 말하기’ 등 천차만별하게 이어졌습니다.
▲사진4. 전신이완운동
▲사진5. 연꽃 만드는 과정
무용 수업 전 준비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몸을 감싸주는 전신이완운동은 몸이 부드러워지도록 도와줍니다. 명치에 쌓인 울화는 나비 모양 마사지를 통해 풀어줍니다. 울화가 쌓일 때 내 가슴을 치며 나를 아프게 하지 말고, 살살 달래주듯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길 바랍니다.
▲사진6. 무용 중인 강사님1
▲사진7. 무용 중인 강사님2
아트키트 안에 들어있던 몽탁풀치마를 허리에 감싸고, 천을 가지런히 접어 반으로 포갠 다음 고무줄을 묶어 풍성하게 꽃을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앙상블 소홀지기의 ‘벚꽃잎 흩날릴제’를 배경음악으로 깔아준다면 무용에 필요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강사님의 시범 춤이 이어지고 지영씨들은 앉아 관람합니다. 꽃과 ‘나’는 서로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존재로서, 꽃을 곧 ‘나’입니다. ‘나’는 꽃을 들고 여정을 떠납니다. 꽃길을 걸으면서 꽃을 심어준 ‘나’는 이내 충만함을 느끼며 여정에서 돌아오는 내용의 무용입니다. 강사님의 시범 춤이 끝난 뒤, 지영씨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젠 내가 출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사진8. 손을 뻗는 자세
무용을 끝낸 지영씨들은 저마다 소감을 밝힙니다. 마지막으로 꽃에게 보내는 편지, 즉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번도 자신에게 편지를 써본 적 없는 몇몇 지영씨들은 눈물을 살짝 보이기도 합니다. 낯설고 어색한 기분에 짧게 쓰는 지영씨들도, 해주고 싶었던 말이 많아 종이를 가득 채우는 지영씨도 있습니다. 강사님은 웃으며 온전히 나에 대해 알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스토킹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사진9. 몽탁풀치마를 입은 수강생의 모습
”우리가 앞으로 백 년 정도 살게 되고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관을 지니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만이 아니라 실재와 관련하게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건 그 밖의 무엇이건 간에 사물 그 자체로 보게 된다면, 아무도 시야를 가로막아서는 안 되므로 밀턴의 악귀를 넘어서서 볼 수 있다면,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실재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때에 그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치게 될 것입니다.“
버지니아의 울프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주디스를 언급합니다. 생각하는 것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 때 ‘자기 자신이 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 우리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소로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우리 안에 잠재되어있는 빛나는 가능성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 놓인 지영씨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자기만의 방을 찾을 수 있을까요? 결혼, 육아, 생애 전환기에 놓인 나는 어디서 어디로 가고, 또 어떻게 살고 있는가. 출산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이 많은 지영씨들은 오늘 배운 무용을 통해 온전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0월 14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되는 <지영씨의 인생부록Ⅱ-자기만의 방>을 통해 모든 지영씨가 자기만의 방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민주 (11기 통신원)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될까봐 이곳에 지원해 글을 쓴지 올해로 3년이 됐다. 광주의 문화예술교육현장에 가면 세상에 새롭고 의미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하느라 바쁘다. 열정적이면서 무해한 것들에 대해, 사소해 보이는데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들에 대해 취재하고 그것들을 엮어 글로 풀어내고 있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내가 바빴던 경험들이 잘 드러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