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당은 어디니?”
창의예술학교 청소년 플랫폼 마당집 ‘바람이 머무는 마을학교’
통신원 박영수
마음이 복잡하다. 그동안의 반오십 인생에 이렇게 기특한 녀석들을 얼마나 만나봤을까 싶다. 내가 이불에 대동여지도 못지않은 행위예술을 하고 있을 나이에, 이 아이들은 진짜배기 예술을 하고 있다. 그것도 재료까지 직접 구해 와서 말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알바비를 주는 것도 아니다. 페인트칠 하는 게, 타일조각 벽에 붙이는 게 그냥 재미있단다. 화가가 꿈이냐고 물어봤더니 이상한 아저씨 쳐다보듯 한다. 그리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영화에 나올법한 명언 한 마디 툭 내뱉는다.
"내가 있을 곳이니까 내가 책임져야죠.”
놀이터보다 더 놀이터스러운 곳, 마당집
취재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니, 열띤 회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아이고, 실례. 마침 옆에 있는 신가초등학교의 하교시간이어서, 잠시 아이들을 구경하러 나왔다. 터덜터덜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는 요 친구는 학원가는 길일 테고, 온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한 저 친구는 어머니께서 집에 치킨을 시켜놓으셨나 보다. 우르르 달려가는 저 무리는 분명 피시방 무리겠지. ‘요즘 애들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가는 곳이야 뻔하지 뭐’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아이들은 뻔하지 않은가보다. 그대로 곧장 마당집으로 들어가더니 목을 축이고는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어댄다. 모임 시간은 네 시인데 지금은 세시 언저리이다. 아이들은 아마 그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낼 생각인가보다.
나로서는 오늘 처음 오는 마당집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바로 위에 신가도서관 놀이터가 있음에도, 굳이 에어컨도 안 틀고 있는 마당집에 와서 서로의 하루를 늘어놓는 아이들. 말 다 했다. 마당집이야말로 그들이 마음 놓고 맘껏 놀 수 있는, 진짜 ‘놀이터’라는 것.
마당집, 그리고 뚝딱똑딱 예술창고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신가동 언덕 위의 집들을 지나면, 단연 온 몸을 화사하게 물들인 집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저곳 아기자기한 벽화에서부터 빨랫줄에 걸린 예쁜 편지들, 바람개비, 아담한 간판까지, 한 눈에 보아도 많은 추억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늘은 마당집의 하정호 대표님과 창의예술학교가 만나 ‘바람이 머무는 마을학교’를 만드는 날이다. ‘바람이 머무는 마을학교’는 버려진 자원을 되살려 마을을 멋지게 디자인하는 프로그램이다. 대표님은 마을 아이들 및 마을 예술가들과 함께, 아무도 찾지 않던 폐창고를 ‘아이들의 놀이공간이자 마을 주민들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 이름하여 ‘뚝딱똑딱 예술창고’!
마당집에서의 길고 긴 회의가 끝나자, 드디어 ‘뚝딱똑딱 예술창고’가 있는 곳으로 출발한다. 산뜻산뜻 걸으니 5분 남짓의 거리였다. 이윽고 창고입구에 도착했다. 현수막 재질의 커다랗고 귀여운 간판이 눈에 띈다. 원래 이곳은 비아농협의 폐창고였다. 과연 곳곳에 붙어있는 정육, 낙농 등등의 이름표들이 아직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깨진 타일들을 붙여 만든 다양한 아이들의 모습,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시계, 알록달록한 벽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고철로 만든 커다란 공룡 한 마리.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자태를 뽐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저기 구석에서 순진하게 수다를 떨고 있는 아이들이 진짜 이걸 다 만들었다고? 한 번 물어보기로 한다.
Q. 우와, 여기 보면 타일도 붙이고 벽화도 그리고 페인트칠까지 돼있네! 이걸 다 너희가 한거야??
A. “저기 붙인 타일 저희가 다 모아 온 거예요! 가지고 온 걸로 하나하나 다 직접 붙였어요. 타일 깨는 것도 우리가 했어요.” - 이해름 / 수완중 1학년
A. “초록색 칠한 건 저어기 (미끄럼틀 쪽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가르키며) 동생들이 한 거예요. 우리는 여기 주황색 부분 다 페인트칠 했는데, 우리가 훨씬 잘했죠?” - 이주영 / 수완중 1
‘답은 정해져 있어, 넌 대답만 하면 돼!’의 눈빛으로 물어보니 ‘으..응 그래!’ 고개를 연신 끄덕일 수밖에. 그런데 정말 잘하긴 했다. 보통솜씨가 아니었다. 처음에 공간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 간판 그리는 일부터 시작해 모든 재료수집, 밑그림, 채색까지 아이들의 힘으로 했다니 대단 그 자체. 진짜 너네 쫌 멋있다.
대표님께 공간의 전체적인 콘셉트를 여쭤봤다. 고철로 만든 공룡은 마을 예술가이신 이호동 작가님의 작품으로, 그 공령은 마법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거란다. 그리고 타일로 만든 아이들은 그 공룡을 구하기 위해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기에서 ‘공룡’은 재개발 소식으로 비어가는 마을을, ‘아이들’은 마을공동체를 통해 신가동을 일으키려는 신가동 주민들의 모습을 투영했다. 마법에 빠져버린 저 공룡이, 한편으로는 진정한 놀 공간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아이들과 같은 입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대표님은 이 콘셉트로 현장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시면서, 아이들의 투박한 낙서 하나하나 까지도 고스란히 살려 작품을 만들고자 하신단다. 실제로 보면 친근한 담벼락 낙서 같기도 하고 정겨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같은 아이들의 흔적이 벽화에 오롯이 남아있다.
마음껏 떠들어도 되고, 마음속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여기저기 낙서도 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마을 친구들과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는 이 곳. 아이들에게 이만한 공간이 있을까? “내가 있을 곳이니까 내가 책임져야죠.” 자신들이 예술창고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아이들.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예술창고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을 이젠 이해할 수 있겠다.
공룡의 마법이 풀리는 날을 고대하며
예술창고가 완성되면 마을주민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서 마을잔치처럼 꾸밀 예정이란다. 이 초대장 역시도 아이들의 몫이다.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서 하고 싶은 말을 잔뜩 써내려가는 아이들의 눈망울은 기특하기 그지없다. 예술창고가 완성되면, 한쪽은 미끄럼틀과 놀이방을 갖춘 아이들의 따뜻한 휴식공간으로, 다른 한쪽은 주민들의 문화예술공간으로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삶으로 실현하는 진짜 문화예술교육의 현장을 몸소 체험하고 오는 기분이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지나가는 길이면 다 들러서 구경하고 가신다. 마을의 관심거리일 뿐 아니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다다음주가 기말고사라며 하소연하는 아이들을, 어느 누구도 공부해야 한다며 혼내거나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자기가 여기서 무얼 했는지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아이들의 말에 그저 귀 기울여 줄 뿐이다. 페인트칠 하는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놀림을 어여쁘게 바라볼 뿐이다. 분명 바깥의 마을은 고철덩어리 공룡처럼 시간이 멈춘 듯 한 골목길들로 가득한데, 예술창고 안에서는 여기저기 생기 있는 웃음이 넘쳐난다.
함께 만들어가는 ‘뚝딱똑딱 예술창고’는 이렇게 신가동 주민들의 삶에 스며들어 또 하나의 ‘마당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당에서 마음껏 소리치고 놀며 자연스럽게 문화공동체를 형성하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예술창고가 앞으로 마을에 얼마나 더 멋진 생기를 불어넣어 줄지, 고철덩어리 공룡의 마법이 풀리는 날을 기대해봄직 하다.
아이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스스로에게 “너의 마당은 어디니?”라며 넌지시 물어보게 되었다. "나의 마당은 어딜까..? 우리의 마당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