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안의 목소리를 보여줘!
-문화집단 열혈지구 ‘흥놀이 프로젝트 놀이하는 사람들 NO 2 나는 누구?’-
7기 통신원 박영수
눈앞에 놓인 새하얀 가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손에 보드랍고 날랜 붓 하나를 쥐고, 팔레트 위에 방울방울 얹어진 아크릴 물감들을 곁에 두고서, 고민에 빠진다.
“통신원 선생님도 같이 그려보세요. 주제는 ‘미래의 내 모습’이예요.”
사실 누구에게든 ‘미래의 나’는 흥미로우면서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일 테다. 특히 이십대의 중반, 아직 걸어보지 못한 몇 갈래의 길 앞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나에게는 더더욱. 지금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한 번 그려지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면이 될 이 녀석은, 마치 지금 나의 모습 같다. 이내 조심스럽게 붓의 끝머리를 잡고서 가면 위에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발길 부르는 곳으로 걸음을 내딛는 나를 상상하며...
거침없이 일필휘지로 가면을 채워가는 어머니도 있는가하면, 소크라테스에 빙의해 가면과 심오한 철학적 고민을 나누고 있는 분도 있다. 리얼리티가 중요하다며 턱에 수염까지 그려 넣고서야 만족해하시는 아버님, ‘칠하다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하고는 일단 광범위 색칠부터 시전하시는 다른 어머님 등등, 아무튼 간에 흥놀이 멤버들의 뚜렷한 개성들이 돋보인다.
작년 12월, 흥놀이 프로젝트는 ‘10분’이라는 주제로 멋진 퍼포먼스 및 성과 전시회를 선보인 바 있다. 그리고 올해, ‘나는 누구?’라는 주제로 멤버들을 모집하여, 두 번째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제목은 ‘다시 한 번 커튼콜.’ 벌써 날짜와 장소도 나왔다. 11월 26일 오후 5시, 장소는 작년과 동일한 빛고을 아트스페이스 5층이다. 공연이 한참 남았지만 벌써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셈. 그 완성도가 어느 정도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모든 과정은 문화집단 열혈지구 전경화 대표님의 주관으로 진행되는데, 콜라보 작업으로 꿈항아리 인형극단 단장님이신 김미경 대표님께서 함께하고 있다.
위에서도 눈치 챘겠지만 지금은 11월 퍼포먼스 공연에 쓰일 가면을 직접 제작하는 시간이다. 덕지덕지 물감을 덧입히며 아무렇게나 꾸미는 가면은 당연히 아니다. 오늘의 미션은 바로 ‘미래의 나’를 가면 위에 그려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리든, 되고 싶은 모습을 그리든 상관없다. 그저 내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가면을 통해 진솔하게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면만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봉제인형을 만들기도 한다. 봉제인형 역시 멤버들의 삶과 가치관을 투영하여 만들어진다. 혹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해보지 못한 무언가를 인형을 통해 대리성취하기도 한단다. 아쉽지만 인형 만들기는 전 시간부터 이어오던 작업으로,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지는 못했다.
이 외에도 11월 공연을 준비하며 다양한 문화 활동, 미술활동들을 진행한다. 그리고 모든 활동들은 단순한 수업으로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과 토론이 병행된다. ‘나는 누구?’라는 주제에 맞게 끊임없이 스스로와의 대화를 통해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민도 잠시. 곧이어 여기저기서 붓질이 시작된다. 소녀같이 해맑던 어머니들의 눈망울이 야무지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느 인생의 어느 이야기 하나 놓치기 싫은 마음에, 뒤에서 몰래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작업과정을 지켜보았다. 붓을 잡고 있는 이 시간만큼은 모두가 예술가 못지않은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연이 궁금해지는 가면, 거의 예술작품 수준으로 승화된 가면 등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있어, 살포시 다가가 보기로 했다.
Q. 가면이 정말 화려해요! 어떤 걸 표현하신 거예요?
A. 화려해 보인다면 성공했네요. (웃음) 저는 얼굴을 두 부분으로 나눠봤는데, 한 쪽은 부요함을, 한쪽은 행복함을 표현했어요. 지금까지 돈 때문에 힘든 부분들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나도 부족한 거 없이 살고 우리 아이들이 필요한 돈도 좀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한 쪽은 행복인데,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좋아해주고 행복해질 수 있었으면 해요. - 박선자 어머니
그런데 언뜻 보니 가면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옆에 있는 가면과 비슷해 보인다. 여쭤봤더니, 옆에 계신 어머니랑은 자매시라 한다.
Q. 어쩐지~느낌이 비슷합니다. 어머니는 어떤 걸 표현하셨는데요??
A. 저는 나이가 들어도 더욱 더 멋을 내고자하는 바램을 담았어요. 볼터치도 해봤고요. 지금은 하기 힘든 화려한 색깔로 염색도 멋있게 해봤어요. -박형자 어머니
이번에 소개하는 가면은 형형색색 눈이 부셔서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미술 전공하셨냐고 여쭤봤더니 발레하시는 분이시란다. 너무 예쁘게 잘 만들어진 인형 옷도 다 직접 만드신 거라는데, 이런 능력자가 또 있을까 싶다.
Q. 와, 가면만 봤는데 그냥 어머니는 소질이 뛰어나신데요?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가면인가요?
A.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한 작품이에요. 한 쪽은 흐릿하고 한 쪽은 선명하고. 똑 부러지고 정직하게 살다가도 흐지부지 흐리하게 살기도 하는 모습을 담아냈어요. 화려한 나무를 그려 넣은 이유는, 비록 저도 중간에서 선명하고 흐릿한 삶을 왔다 갔다 하지만, 분명한 꿈이 있고 그 꿈을 통해 화려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고요. -서훈희 어머니
작업이 모두 끝나고 가면과 인형들을 한데 모아 단체 샷을 찍었다. 모두 똑같이 생긴 흰색 가면으로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 자기 주인과 똑 닮았다. 가면 하나에 삶 하나, 인형 하나에 인생 하나 담겨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다음 주에는 이 가면과 인형들을 가지고 흥놀이 멤버들끼리 공연을 할 거라며 전경화 대표님이 귀띔해주셨다. 자신이 만든 작품들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퍼포먼스화 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무대에 올라간 순간만큼은 예술가와 일반인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완벽한 연습과 대본 작업을 통해 빈틈없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대표님의 꿈이라고. 그러니, 다가올 11월 달의 공연, <흥놀이 프로젝트 : 놀이하는 사람들 No.2_’나는 누구?‘>의 무대를 기대하셔도 좋다!
p.s.
인형탈 : 공부를 잘하는 나, 학사모를 쓴 나, 엘리트... 대학을 가고 싶었다. 대학 졸업을 한 나의 모습,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뭉클해진다.
가면 : 올림픽 대회에 나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금메달 딴 내 모습을 보여주는 걸 상상해 보았다.
종이 한 장에 담담히 써내려가다 이내 먹먹한 마음이 비집고 새어나와 목을 매시던 어느 어머니의 하루를, 마음 깊이 담아 돌아갑니다. 누구에게나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오늘따라 고귀하고 애틋하게 느껴집니다.